2008년 11월 24일 월요일

통일은 한반도 평화를 완성한다

한국인에게 왜 북한과 통일을 해야 하는가 하고 물으면 여러 가지 이유를 대지만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유는 바로 같은 민족이 두 개의 국가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은 비극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대답은 다분히 민족적인 정서에서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통일에 대한 한국 대중의 인식이 아직 민족적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민족적 이유를 넘어서서 한국은 북한과 통일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명쾌한 답을 하려면 우선 지금의 체제, 즉 한반도 분단체제가 갖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분단체제는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대치에 따른 군비 지출 증가와 안보의 불안정성을 야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체제는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한반도 분단체제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북한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소련, 중국 등 한반도 주변국이 개입한 한국전쟁에 의해 고착화된 냉전체제의 산물이다. 냉전에 의한 주변국 개입과 휴전 상황이라는 한반도 분단체제의 특성은 결국 주권국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지금의 체제 속에서는 한국이나 북한이나 모두 끊임없이 한국전쟁 관련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최근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국외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에 따라 주한미군 병력을 대거 이전하고 있으며, 전시 작전권을 한국에 이전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미국 정부는 효과적으로 북한을 공격하고자 추진하는 것이라고 밝혔지만, 안보 전문가들은 북한군에 대한 방어는 한국군에게 넘기고, 주한미군은 세계 여러 나라의 분쟁, 전쟁에 개입하는 용도로 활용하려는 것이 미국의 실제 계획이라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이는 한반도의 어느 국가도 원하지 않는 전쟁이 주변국에 의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지금의 분단체제이다.

따라서, 통일은 완전한 민족국가의 성립이나 영토의 확대뿐만 아니라 주변국 개입의 명분을 차단함으로써 근본적으로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통일을 반대하는 이는 북한과의 경제적 격차를 감안할 때, 지금의 경제기반 자체가 괴멸할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분단을 통해 지킨 그 기반은 전쟁이 한 번 발생하면 순식간에 완전히 무너지게 돼 있다. 그리고 그 전쟁이 우리가 원하지 않는 전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하나의 엄청난 비극이다. 그러므로 한국과 북한이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한국과 북한의 통일은 이루어져야 한다.

2008년 11월 17일 월요일

성매매 자체가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

최근 경찰의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 성매매 업소 단속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의 동대문경찰서에 대한 압력으로 시작된 이 단속은 성매매에 대한 일반 대중의 논쟁을 지난 미아리 텍사스 단속 이후 다시 수면 위로 끌어 올림으로써 한국 성문화의 실태를 다시 보여주고 있다. 많은 남성이 도대체 혼자 사는 남성은 어떻게 성욕을 풀 라는 것이냐며 경찰의 성매매 업소 단속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성욕이라는 것이 꼭 지금과 같이 여성의 성을 사는 방식으로 충족되어야 하는가? 일반적으로 남성은 성매매와 관련한 논쟁에서 여성보다 성욕이 굉장히 많이 느끼며, 성욕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므로 남성의 성욕은 반드시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렇게 성욕이 강하다는 남성 중에서 성을 사는 남성은 일부에 불과하다. 애인이 있는 남성을 제외한 싱글 남성 중에서도 성을 사는 하는 남성이 있는가 하면 성을 사지 않는 남성도 분명히 있다. 일반적인 남성의 성욕에 대한 관점에 따르면 성을 사지 않는 남성은 인간이 아닌 것이 된다. 따라서, 성욕을 성매매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성매매가 가지는 또 다른 문제점은 그 이름이 잘 나타내고 있듯이 자본과 결합하면서 문제가 더 악화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성을 파는 여성은 찾기 쉬워도 성을 파는 남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분배가 성별 간에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부가 남성에게 편중되어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은 부를 미끼로 여성에게 성을 팔 것을 쉽게 요구할 수 있고,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린 여성은 남성의 그러한 요구를 받아들여 부가 이전되어야만 그나마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고, 여성이 다소나마 경제적 부를 획득하기 시작하면서 남성이 성을 파는 이른바 호스트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처럼 성매매는 도덕적 논의를 제하고라도 자본주의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인 부의 불평등과 같은 심각한 구조적 문제점을 갖고 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을 파는 행위가 사회적으로 인정된다는 것은 곧 그 사회가 구조적인 성 차별 기제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매매가 인정되어서는 안 되며, 앞으로 제도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데 사회가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2008년 11월 9일 일요일

신자유주의의 대안은 있는가?

한국사회에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 김영삼 정부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냉전체제의 해체와 더불어 WTO 체제가 출범하자, 김영삼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조금씩 수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김대중 정부에서는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로의 전환과 자본시장 개방이라는 형태로 구현됐고, 김대중 정부의 뒤를 이어 진보적 정치색을 드러내며 집권한 노무현 정부에서도 결국 임기 말 자유무역협정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하기에 이른다.

신자유주의는 자본 활동의 제약을 최소화하여 ‘자유롭게’ 시장 원리에 따라 이윤을 추구하게 함으로써 자본의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으며, 적자생존 원리에 따라 시장에서 모든 경제주체가 전력을 기울여 목표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 ‘자유’의 전제가 형식적 평등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자유와 기득권을 지키거나 확대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가 이른바 ‘출발선의 차이’를 방관하여 20:80으로 상징되는 부익부 빈익빈을 초래한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존재하는가? 이런 고민에 대해 서구에서는 복지병으로 대표되는 사회 민주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인정하고,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 1980년대 말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를 통해 설득력을 얻게 된다. 그 후 1997년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Tony Blair)가 총리로 집권하면서 제3의 길(Third Way)이 자신이 나아갈 길이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흐름은 서구사회에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3의 길도 결국은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신자유주의화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최초고용계약제를 둘러싼 프랑스 사회의 갈등은 제3의 길이란 이데올로기가 현실세계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에서 그 본질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대안의 부재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진보진영을 비롯한 한국의 어떤 사회집단이나 개인도 구체적 대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렇게 신자유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곧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라는 대중의 인식이 한국사회에 생겨버린 것이 현실이다. 전교조의 교원평가제 반대에 대한 일반 대중의 부정적인 시선부터, 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은 시대의 흐름이므로 따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그러한 예이다. 일반적으로 사회 내 진보세력이 변화라는 담론을 제기함으로써, 그 집단 내에서 일종의 헤게모니를 쥐려 하는 것이 보편적인데, 한국사회에서는 거꾸로 보수세력이 신자유주의라는 우군을 등 뒤에 둔 채 변화를 요구하면서 자연스럽게 헤게모니를 쥐게 된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적어도 신자유주의는 실제 그러한지는 알 수 없으나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구체적 방안으로 자본의 자유와 경쟁의 자유를 제시하고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약속하는 것이 허구로 보일 정도로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비판을 제기해야 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신자유주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변화 방안을 제시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이 땅의 진보세력이 가져야 할 고민이며, 또한 나의 고민이기도 하다.

2008년 11월 1일 토요일

민주주의의 절차보다는 정치참여를 고민할 때

인류의 역사에서 사회적 집단 또는 사회적 공동체가 발생한 이후, 그 집단 구성원 사이의 이해를 어떻게 조정할 것이며, 어떻게 질서를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항상 있었다. 플라톤의 철인왕정론과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사상,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홉스·로크·루소 등이 주장한 사회계약설 등이 그런 사회체제에 대한 고민 끝에 나온 지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 많은 국민국가는 그러한 정치체제 중 ‘민주주의’를 택해 국가를 형성하고, 발전시켜오고 있다. 대한민국도 헌법 제1조에서 천명하듯 민주주의를 채택한 ‘민주공화국’이다. 그렇다면, 왜 세계의 여러 나라는 민주주의를 택하는 것인가? 그 이유는 바로 민주주의가 가진 특성, 즉 민주주의는 전체 구성원의 의사를 가장 잘 반영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많은 현대 국가에서는 그러한 민주주의의 다원적 특성이 사회 내에서 인간의 자유·평등·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기초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민주주의라는 것이 어디까지나 ‘제도’라는 것이다. 제도는 사회의 구성원 사이의 가치체제를 바탕을 두고 형성되는 복합적인 사회규범의 체계라 할 수 있으므로, 사회 구성원이 어떤 가치를 갖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제도의 성공과 실패가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제 민주주의와 같은, 단순히 어떠한 정치 형태가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을 구현하는데 더 적합한가에 대한 논쟁은 그 제도 자체의 결함을 발견할 수는 있어도, 중우정치의 위험성과 다수결의 횡포와 같은 민주주의가 제도로써 사회에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근본적인 결함을 발견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민주주의가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제도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민주주의 역시 그 자체가 가진 결함으로 독일의 나치즘처럼 후퇴할 수도 있다. 또한, 한국사회가 민주주의가 내용적으로 발전하도록 하려는 노력이 부족하여 장년층과 노년층 중 일부는 권위주의 정부가 민주화 이후의 정부보다 나았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따라서, 제도에 대한 논쟁과 더불어, 사회 구성원은 민주적 가치를 지키고자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통해 민주주의가 갖는 결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지난 상반기에 있었던 이명박 정부의 쇠고기 시장 개방으로 빚어진 촛불시위는 민주주의 제도가 자리 잡은지 이제 20년을 넘긴 한국사회에서 그런 고민을 대중의 수준에서 공론화시키고 초보적 수준일지라도 그 대안을 마련한 거의 최초의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은 쇠고기 파동이 일자 사회가 실질적으로 민주주의적이지 않을 때 어떻게 민주적으로 의사표시를 할 것인지 고민하고, 이를 정치에 어떻게 반영시킬 것인가에 대해 논쟁했다. 그리고 그러한 논쟁의 결과를 평화적 촛불시위라는 형태로 보여주었으며, 그로써 일정 정도의 정치적 성과도 거뒀다.

촛불시위를 통해 한국사회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왜 인류가 민주주의를 택했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결과, 민주사회의 구성원이 참여의식과 신념, 용기를 가지고, 사회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하며,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출할 때만이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정의이며, 이를 민주적으로 실현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고민의 산물만이 민주주의를 더 발전시키는 실제적인 원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2008년 10월 18일 토요일

평화에 대한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탈피해야 한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역사학자이면서 정치이론가였던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 Machiavelli)는 <군주론>이란 책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 책에서 군주가 이미 이루어진 현실을 버리고 이루어져야 할 이상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자신을 보존하기는커녕 파멸하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그는 정치에서의 현실주의(realism)의 전형을 보여줌으로써 후세에 정치적 현실주의의 사상적 아버지로 칭송받게 된다.

이러한 현실주의적 관념은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나 탁상공론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를 수용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예를 들 수 있는 것이 군대의 폭력성과 존폐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이다. 많은 한국인들은 훈련소에서 신념상 집총을 거부하는 자와 지난 국군의 날 행사에서 군대 폐지 퍼포먼스를 보여준 대학생 강의석씨를 비롯한 평화주의자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행동은 군대를 통해 전쟁억제력을 갖춰야만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현실을 무시한 무책임한 태도를 보여준 것이라며 비난한다.

그렇다면, 그 현실이라는 것은 수용할 수밖에 없는 영원한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역사는 아니라고 답하고 있다. 인류의 대다수는 문명이 태동한 이후 천 년이 넘는 동안 계급에 따른 차별, 성별에 따른 차별을 당연시 여겨 왔다.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상놈은 지엄하신 양반과 같지 않았고, 아녀자는 남편의 수종을 드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게 현실이었다. 그런데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현실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이처럼 현실이라는 것은 마치 숙명처럼 한 인간이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회의를 품음으로써 언제든지 도전할 수 있는 대상이다. 강의석씨 그리고 이 땅의 수많은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자는 군대가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사람의 생각에 대해 회의를 품고, 군대가 실제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인지, 혹시 군대가 있으므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현실에 도전한 것이다.

그러한 그들의 행동은 현실의 실체에 대해서 좀 더 가까이 접근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우리가 말하는 그 현실이라는 것은 특정한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를 은폐시킨다. 사람들은 평화를 유지한다는 현실적 목적 때문에 기꺼이 비용을 대가며 군대를 유지한다고 말하지만,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통해서 무기산업계와 석유업계와 같은 특정집단의 이익추구 때문에 군대가 존재하는 모습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우리는 북한의 군사력이 우리보다 월등하다는 잘못된 인식으로 주권침해 논란에도 미군의 주둔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평화에 대한 현실주의적 관념에서 탈피해야 한다. ‘현실’에 기반하여 군대 없이는 평화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유지하는데 군대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한 번도 벗어나지 못했던 군대와 평화에 관한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평화적 사고가 가능해지고, 그런 사고는 본질적인 인류의 평화에 다가설 수 있는 초석이 될 수 있다.

2008년 10월 12일 일요일

건국 기념도 필요하나 그것이 해방보다 우선할 순 없다

그동안 주로 학계에서만 화제가 되던 건국기념일에 대한 논쟁이 지난 8월 정치계를 비롯한 시민사회에까지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뉴라이트전국연합 등 보수진영은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을 발표한 1948년을 기점으로 건국기념일을 정하는 것이 옳다며 지금의 8월 15일 광복절을 건국절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진보진영은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는 것은 항일의 의미를 축소하고 훼손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역사적으로 건국기념일은 서유럽의 근대 민주주의 국가 형성 과정에서 등장한 개념이다. 유럽은 고대 로마제국이 붕괴된 이후 정치적으로는 봉건체제, 경제적으로는 장원체제에 의한 다원적 집합체가 형성되었다. 그 후 이러한 집합체 사회의 모순이 커지면서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한 시민혁명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그러한 집합체를 하나로 통합하여 민족을 단위로 하는 근대 국가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건국기념일은 시민혁명에 의한 근대 국가의 수립을 기념하는 날로써 자리매김하게 된다.

건국기념일을 제정하자는 주장은 그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한다. 즉, 한국사에서 근대 국가라고 할 수 있는 국가는 대한민국이고, 따라서 대한민국 건국을 기념하는 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을 듣고 어떤 이는 유럽의 역사적·사회적 맥락이 아시아 등 다른 세계에도 보편적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건국기념일이 민족을 단위로 한 최초의 국가를 기념하는 날이라면 유럽과 다르게 한국사에서는 단군을 부정한다 하더라도 그런 국가는 고대 시대부터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 국가를 민족 단위의 집합체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바라본 것이다. 근대 국가에 대한 그러한 인식은 근대사회가 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개인을 존중하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라는 특징을 갖게 되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대한민국은 근대적 의미의 국가로써, 봉건적 신분제로부터의 해방, 대의제 민주주의를 통한 대다수 민중의 정치 참여 확대 등을 최초로 실현한 국가라는 점에서 충분히 역사적으로 기념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한국 보수진영의 건국기념일 제정 노력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지금 건국기념일을 제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광복절을 건국기념일로 바꾸자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복은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건국에 비할만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한국 보수진영의 역사적 뿌리와 건국 초 그들이 보여준 모습을 상기할 때, 그들이 광복 대신 건국을 기념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려는 시도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해방일과 건국일이 8월 15일로 같은 이상, 이 날은 광복의 의미를 살리면서 건국의 의미를 되새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참된 의미의 건국기념일이 된다. 민족 또는 민중의 해방 없이는 건국도 없기 때문이다. 건국기념일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해방보다 우선할 순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08년 9월 29일 월요일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판단할 수 있는가?

영화이자 소설이기도 한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주인공 알렉스는 자신의 쾌락을 취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폭력배가 되어 타인에게 수차례 폭력을 행사한다. 결국, 그는 사법당국에 의해 검거되어 교도소에 입소하게 된다. 장기간 복역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새로운 교도 프로그램의 실험 대상이 되어 교육을 받은 주인공은 교도소에서 조기에 출소하지만, 가족은 그의 출소를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당황한다. 그리고 집에 들인 하숙생은 주인공의 과거 범죄를 저지른 행적을 거론하며 그를 비난한다. 그 모습을 본 주인공은 분노의 감정을 느끼고 또다시 폭력을 행사하려고 하지만 그가 받은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구토 증세를 느끼며 쓰러진다.

그는 분명 자신의 출소를 반기기는커녕 오히려 당황하고 자신의 방을 하숙생에게 내어준 가족과, 자신의 과거를 들춰내는 하숙생에 대해 원망과 분노의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가 교도소에 입소하기 전에 보여준 폭력의 계기와는 분명히 다른 폭력의 계기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폭력전과가 있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국가권력에 의해 표현의 자유를 제한당했다. 자신의 분노를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국가권력에 의해 제한당해버린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탄생한 것이다.

그가 그 하숙생을 구타함으로써 예전의 그의 모습처럼 살인에 이르게 했을지 아니면 그가 의지력을 발휘해 단순한 주먹다짐으로 끝났을지 누가 예단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을 국가와 사회가 자기 멋대로 판단을 내리고 그의 폭력행사에 대해 어떠한 규정을 내리고 그를 구속하고 억압할 수 있는 것인가? 싸우면서 더 친해진다는 말이 있듯 그가 그 폭행을 계기로 하숙생과 친구처럼 지낼 가능성은 정말 없었을까?

혹자는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통쾌하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한 알렉스라는 한 인간이 갖는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얻게 된, 즉 타인에게 피해를 주며 얻은 또 다른 쾌락에 불과하다. 오히려 사회가 그러한 폭력을 계속해서 생산해낼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냈고 이를 정당화했다는 점에서 알렉스의 폭력보다 더 교묘하고도 구조적인 폭력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남에게 구속을 당하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리는 것은 가장 인간적인 행동이다. 자유는 인간 이외에는 어떤 것도 누릴 수 없는 권리이며, 그 어떤 가치보다 인간 자신의 의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러한 자유를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그 사회의 관습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제한을 가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의 미숙한 판단으로 또 다른 개인의 피해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지, 인간의 의지라는 소중한 인간적 가치를 잃어버리는 길로 나아가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2008년 9월 28일 일요일

나는 장미란에게 아름답다 말하지 않을 것이다

어제 열린 2008 베이징 올림픽 역도 여자 75kg 이상급 경기에서 한국의 장미란 선수가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며 금메달을 땄다. 그 광경을 지켜본 많은 한국인은 그녀의 성과에 열광했고 한국 언론에서는 그녀가 흘린 땀과 굳은살이 이 세상 어떤 여인보다 아름답다며 치켜세웠다.

그렇다. 단순히 생각하면 그녀가 이러한 성과를 거두고자 흘린 땀방울은 아름답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한국은 이번 올림픽에서 장미란 선수 말고 다른 많은 선수도 메달을 땄지만 한국인이나 한국 언론은 그들에겐 아름답다고까지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여자 양궁 단체전 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박성현, 윤옥희, 주현정 선수에게는 격려와 칭찬에 머물렀다. 박태환을 비롯한 남자 메달리스트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메달을 따고자 엄청난 노력을 했을 터인데 왜 한국인은 유독 장미란 선수의 땀방울만 아름답다고 하는 것일까?

이러한 독특한 반응의 근저에는 바로 한국사회의 지독한 외모 지상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그녀는 경기장에서 근력의 힘으로 엄청난 무게의 바벨을 들어올려야 하는 역도 선수다. 따라서 경기를 위해 뚱뚱한 체격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실제로 그녀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외모와는 거리가 멀다. 심지어는 그녀의 외모가 여자라고 생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수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그녀가 올림픽에서 메달을 땄다. 그러자 그녀의 모습이 인상 깊었던 많은 한국인이 기쁜 마음에 무의식적으로 그녀가 흘린 땀방울과 굳은살은 이 세상 누구보다 아름답다며 그녀의 못생긴 외모를 가지고 그녀의 성과를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녀의 노력과 땀방울이 아름답다는 말이 그녀의 외모에서 나온 것인 만큼 나는 그녀에게 함부로 아름답다고 하고 싶지 않다. 대신에 나는 세계 정상에 선 그녀에게 위대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녀에게만 당신의 땀과 노력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곧 당신의 외모는 못생겼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2008년 9월 27일 토요일

88만 원 세대의 또 다른 질곡

최근 한국사회에서 화두가 되는 말 중에 '88만 원 세대'가 있다. 경제학자 우석훈씨와 기자 출신의 박권일씨가 쓴 책의 이름이기도 한 이 말은 지금의 20대가 세대 내 경쟁 및 세대 간 경쟁 끝에 대다수가 88만 원에서 119만 원 사이의 젊은 비정규직 노동자 계층이 될 것이라는 주장에서 나온 신조어이다.

실제 한국의 많은 20대는 현재 심각한 취업난에 허덕이고 있다. 청년실업 50만이라는 말은 이제 과장으로써 그저 웃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닌 실제 현실이 되어버린지 오래고, 친구와 취업 이야기만 하면 한숨부터 내쉬는 시절을 넘어 이젠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금기가 되고 있다. 그러면서 그래도 열심히 하면 취업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며 지금도 도서관에서 열정을 불태우는 우리의 20대를 보게 된다. 그렇다면, 그 취업이라는 좁은 문에 들어가기만 하면 우리는 인생의 질곡으로부터 해방될 것인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힘겹게 취업의 문을 넘은 20대에게 또 다른 질곡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내 집 마련의 문제이다. 최근 정부와 한나라당은 부동산 시장을 활성화하겠다며 종합부동산세를 손보려 하고 있다. 즉, 세금부담을 완화함으로써 부동산 거래를 촉진하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종부세를 납부하는 계층이 전체 부동산 보유자 중 상위 1 ~ 2%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과 세제 도입 후 주택 시장이 안정화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금의 정부의 여당의 종부세 완화 추진은 필시 부동산 가격 상승을 부추길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종합부동산세가 완화되어 유명무실화되면 주택가격은 더욱 상승할 것이고 10년이라는 신혼부부의 주택마련 기간은 점점 더 길어질 것이다. 사태가 악화일로로 치달으면 대다수의 사람은 평생 내 집 마련은 꿈도 못 꾸고 살아야 할 것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 ‘월세 88만 원짜리 단칸방에 사는 30대’를 일컫는 말로 88만 원 세대란 용어가 재탄생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지금의 88만 원 세대에게 닥칠 또 다른 질곡인 것이다.

우리 20대는 질곡으로 가득찬 이 현실에 순응한 채 감내할 수밖에 없는가? 아니면 정말 누구 말대로 토플책을 덮고 거리로 나가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야 아니 던져야 할 것인가? 토플책을 볼 것인지 짱돌을 들 것인지 그 선택은 각자 본인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이것만은 명백한 사실이다. 지난 10년간 기성세대나 기성정치인은 우리가 겪을 질곡을 하나 둘 걷어내기는커녕 더 많이 심었다는 것과 우리의 의사를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의 부모님도 아니고 대학의 교수도 아닌 우리 자신이라는 것 말이다.

2008년 8월 11일 월요일

또다시 국가주의 바람이 부는구나

올림픽 경기에
올림픽 특집 방송에
올림픽 광고에
올림픽 특집 기사에

아 싫다.

2008년 5월 9일 금요일

실적을 근거로 기관장의 사임을 권해야

현 정부가 공공부문 개혁을 앞세우며 공공기관장 인적 물갈이를 진행하자 논란이 일고 있다. 실제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법률로서 임기가 보장된 문화예술계 단체장에게 직접적으로 자진해서 사표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으며 이외에도 한국전력공사, 한국토지공사, 산업은행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굵직굵직한 공공기관의 경영진에게도 사표를 받고 있다.

공공기관장 물갈이를 추진하며 현 정부가 내세우는 논리는 바로 공공기관장이 전 정부의 엽관주의 인사행정, 즉 이른바 '코드 인사'가 극에 달한 자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전 정부는 낙하산 인사란 비판을 무릅쓰고 정부의 입맛에 맞는 인사를 대거 공공기관장으로 임명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작년 국회에서는 한나라당의 주도로 공기업 및 준정부기관 임원 임명의 객관성 및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공기업의 장을 비상임이사 등으로 구성되는 임원추천위원회가 복수로 추천하여 공공기관운영위원회의 심의 의결을 거친 사람 중에서 주무기관의 장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법률로 못을 박기도 했다.

그러나 전 정권에 대한 심판으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아 탄생한 현 정부도 인사행정에서만큼은 전 정부의 폐습을 그대로 따라하려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정당의 사병화, 행정의 지속성 · 전문성 저하와 같은 엽관주의 인사행정으로 인한 폐해를 경계하고 공공기관 행정의 능률성과 지속성을 보장하고자 한다면 우선 물러나기를 바라는 기관장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지적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는 공공기관장들의 실책에 대해서 지적하지는 않고 그저 정부가 바뀌었으니 전 정부에서 임명된 기관장은 물러나는 게 도리라는 말만 하고 있다. 이러니 자신들의 주도로 만든 법까지 스스로 무시해가며 엽관주의 인사행정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공공기관장 인적 물갈이를 위해서는 지금처럼 일률적으로 모든 기관장에게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종용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현재 재임 중인 공공기관장의 실적이나 공적, 경영성과 등에 대한 정확한 지표를 제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공공기관장 물갈이를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진정으로 엽관주의 인사행정에서 벗어나 실제의 업적이나 공적에 기반한 인사행정의 기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2월 25일 월요일

조선일보 전단지

롯데백화점 본점
롯데백화점 미아점
신세계백화점 본점
현대백화점 미아점
강북중앙학원
강북학림학원
강북학림아카데미
명성학원
서울탑학원
세일학원
소피스트학원
외대어학원 성북분원
YBM ECC 성북
대우건설

위에다 써 놓은 것은 오늘 배달된 조선일보에 들어있는 광고전단지다. 도대체 신문을 구독하는 건지 전단지를 구독하는 건지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