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9일 일요일

신자유주의의 대안은 있는가?

한국사회에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 김영삼 정부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냉전체제의 해체와 더불어 WTO 체제가 출범하자, 김영삼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조금씩 수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김대중 정부에서는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로의 전환과 자본시장 개방이라는 형태로 구현됐고, 김대중 정부의 뒤를 이어 진보적 정치색을 드러내며 집권한 노무현 정부에서도 결국 임기 말 자유무역협정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하기에 이른다.

신자유주의는 자본 활동의 제약을 최소화하여 ‘자유롭게’ 시장 원리에 따라 이윤을 추구하게 함으로써 자본의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으며, 적자생존 원리에 따라 시장에서 모든 경제주체가 전력을 기울여 목표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 ‘자유’의 전제가 형식적 평등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자유와 기득권을 지키거나 확대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가 이른바 ‘출발선의 차이’를 방관하여 20:80으로 상징되는 부익부 빈익빈을 초래한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존재하는가? 이런 고민에 대해 서구에서는 복지병으로 대표되는 사회 민주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인정하고,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 1980년대 말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를 통해 설득력을 얻게 된다. 그 후 1997년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Tony Blair)가 총리로 집권하면서 제3의 길(Third Way)이 자신이 나아갈 길이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흐름은 서구사회에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3의 길도 결국은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신자유주의화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최초고용계약제를 둘러싼 프랑스 사회의 갈등은 제3의 길이란 이데올로기가 현실세계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에서 그 본질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대안의 부재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진보진영을 비롯한 한국의 어떤 사회집단이나 개인도 구체적 대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렇게 신자유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곧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라는 대중의 인식이 한국사회에 생겨버린 것이 현실이다. 전교조의 교원평가제 반대에 대한 일반 대중의 부정적인 시선부터, 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은 시대의 흐름이므로 따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그러한 예이다. 일반적으로 사회 내 진보세력이 변화라는 담론을 제기함으로써, 그 집단 내에서 일종의 헤게모니를 쥐려 하는 것이 보편적인데, 한국사회에서는 거꾸로 보수세력이 신자유주의라는 우군을 등 뒤에 둔 채 변화를 요구하면서 자연스럽게 헤게모니를 쥐게 된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적어도 신자유주의는 실제 그러한지는 알 수 없으나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구체적 방안으로 자본의 자유와 경쟁의 자유를 제시하고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약속하는 것이 허구로 보일 정도로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비판을 제기해야 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신자유주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변화 방안을 제시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이 땅의 진보세력이 가져야 할 고민이며, 또한 나의 고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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