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24일 월요일

통일은 한반도 평화를 완성한다

한국인에게 왜 북한과 통일을 해야 하는가 하고 물으면 여러 가지 이유를 대지만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유는 바로 같은 민족이 두 개의 국가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은 비극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대답은 다분히 민족적인 정서에서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통일에 대한 한국 대중의 인식이 아직 민족적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민족적 이유를 넘어서서 한국은 북한과 통일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명쾌한 답을 하려면 우선 지금의 체제, 즉 한반도 분단체제가 갖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분단체제는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대치에 따른 군비 지출 증가와 안보의 불안정성을 야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체제는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한반도 분단체제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북한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소련, 중국 등 한반도 주변국이 개입한 한국전쟁에 의해 고착화된 냉전체제의 산물이다. 냉전에 의한 주변국 개입과 휴전 상황이라는 한반도 분단체제의 특성은 결국 주권국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지금의 체제 속에서는 한국이나 북한이나 모두 끊임없이 한국전쟁 관련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최근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국외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에 따라 주한미군 병력을 대거 이전하고 있으며, 전시 작전권을 한국에 이전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미국 정부는 효과적으로 북한을 공격하고자 추진하는 것이라고 밝혔지만, 안보 전문가들은 북한군에 대한 방어는 한국군에게 넘기고, 주한미군은 세계 여러 나라의 분쟁, 전쟁에 개입하는 용도로 활용하려는 것이 미국의 실제 계획이라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이는 한반도의 어느 국가도 원하지 않는 전쟁이 주변국에 의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지금의 분단체제이다.

따라서, 통일은 완전한 민족국가의 성립이나 영토의 확대뿐만 아니라 주변국 개입의 명분을 차단함으로써 근본적으로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통일을 반대하는 이는 북한과의 경제적 격차를 감안할 때, 지금의 경제기반 자체가 괴멸할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분단을 통해 지킨 그 기반은 전쟁이 한 번 발생하면 순식간에 완전히 무너지게 돼 있다. 그리고 그 전쟁이 우리가 원하지 않는 전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하나의 엄청난 비극이다. 그러므로 한국과 북한이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한국과 북한의 통일은 이루어져야 한다.

2008년 11월 17일 월요일

성매매 자체가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

최근 경찰의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 성매매 업소 단속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의 동대문경찰서에 대한 압력으로 시작된 이 단속은 성매매에 대한 일반 대중의 논쟁을 지난 미아리 텍사스 단속 이후 다시 수면 위로 끌어 올림으로써 한국 성문화의 실태를 다시 보여주고 있다. 많은 남성이 도대체 혼자 사는 남성은 어떻게 성욕을 풀 라는 것이냐며 경찰의 성매매 업소 단속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성욕이라는 것이 꼭 지금과 같이 여성의 성을 사는 방식으로 충족되어야 하는가? 일반적으로 남성은 성매매와 관련한 논쟁에서 여성보다 성욕이 굉장히 많이 느끼며, 성욕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므로 남성의 성욕은 반드시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렇게 성욕이 강하다는 남성 중에서 성을 사는 남성은 일부에 불과하다. 애인이 있는 남성을 제외한 싱글 남성 중에서도 성을 사는 하는 남성이 있는가 하면 성을 사지 않는 남성도 분명히 있다. 일반적인 남성의 성욕에 대한 관점에 따르면 성을 사지 않는 남성은 인간이 아닌 것이 된다. 따라서, 성욕을 성매매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성매매가 가지는 또 다른 문제점은 그 이름이 잘 나타내고 있듯이 자본과 결합하면서 문제가 더 악화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성을 파는 여성은 찾기 쉬워도 성을 파는 남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분배가 성별 간에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부가 남성에게 편중되어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은 부를 미끼로 여성에게 성을 팔 것을 쉽게 요구할 수 있고,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린 여성은 남성의 그러한 요구를 받아들여 부가 이전되어야만 그나마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고, 여성이 다소나마 경제적 부를 획득하기 시작하면서 남성이 성을 파는 이른바 호스트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처럼 성매매는 도덕적 논의를 제하고라도 자본주의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인 부의 불평등과 같은 심각한 구조적 문제점을 갖고 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을 파는 행위가 사회적으로 인정된다는 것은 곧 그 사회가 구조적인 성 차별 기제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매매가 인정되어서는 안 되며, 앞으로 제도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데 사회가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2008년 11월 9일 일요일

신자유주의의 대안은 있는가?

한국사회에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 김영삼 정부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냉전체제의 해체와 더불어 WTO 체제가 출범하자, 김영삼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조금씩 수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김대중 정부에서는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로의 전환과 자본시장 개방이라는 형태로 구현됐고, 김대중 정부의 뒤를 이어 진보적 정치색을 드러내며 집권한 노무현 정부에서도 결국 임기 말 자유무역협정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하기에 이른다.

신자유주의는 자본 활동의 제약을 최소화하여 ‘자유롭게’ 시장 원리에 따라 이윤을 추구하게 함으로써 자본의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으며, 적자생존 원리에 따라 시장에서 모든 경제주체가 전력을 기울여 목표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 ‘자유’의 전제가 형식적 평등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자유와 기득권을 지키거나 확대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가 이른바 ‘출발선의 차이’를 방관하여 20:80으로 상징되는 부익부 빈익빈을 초래한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존재하는가? 이런 고민에 대해 서구에서는 복지병으로 대표되는 사회 민주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인정하고,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 1980년대 말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를 통해 설득력을 얻게 된다. 그 후 1997년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Tony Blair)가 총리로 집권하면서 제3의 길(Third Way)이 자신이 나아갈 길이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흐름은 서구사회에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3의 길도 결국은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신자유주의화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최초고용계약제를 둘러싼 프랑스 사회의 갈등은 제3의 길이란 이데올로기가 현실세계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에서 그 본질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대안의 부재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진보진영을 비롯한 한국의 어떤 사회집단이나 개인도 구체적 대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렇게 신자유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곧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라는 대중의 인식이 한국사회에 생겨버린 것이 현실이다. 전교조의 교원평가제 반대에 대한 일반 대중의 부정적인 시선부터, 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은 시대의 흐름이므로 따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그러한 예이다. 일반적으로 사회 내 진보세력이 변화라는 담론을 제기함으로써, 그 집단 내에서 일종의 헤게모니를 쥐려 하는 것이 보편적인데, 한국사회에서는 거꾸로 보수세력이 신자유주의라는 우군을 등 뒤에 둔 채 변화를 요구하면서 자연스럽게 헤게모니를 쥐게 된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적어도 신자유주의는 실제 그러한지는 알 수 없으나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구체적 방안으로 자본의 자유와 경쟁의 자유를 제시하고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약속하는 것이 허구로 보일 정도로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비판을 제기해야 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신자유주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변화 방안을 제시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이 땅의 진보세력이 가져야 할 고민이며, 또한 나의 고민이기도 하다.

2008년 11월 1일 토요일

민주주의의 절차보다는 정치참여를 고민할 때

인류의 역사에서 사회적 집단 또는 사회적 공동체가 발생한 이후, 그 집단 구성원 사이의 이해를 어떻게 조정할 것이며, 어떻게 질서를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항상 있었다. 플라톤의 철인왕정론과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사상,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홉스·로크·루소 등이 주장한 사회계약설 등이 그런 사회체제에 대한 고민 끝에 나온 지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 많은 국민국가는 그러한 정치체제 중 ‘민주주의’를 택해 국가를 형성하고, 발전시켜오고 있다. 대한민국도 헌법 제1조에서 천명하듯 민주주의를 채택한 ‘민주공화국’이다. 그렇다면, 왜 세계의 여러 나라는 민주주의를 택하는 것인가? 그 이유는 바로 민주주의가 가진 특성, 즉 민주주의는 전체 구성원의 의사를 가장 잘 반영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많은 현대 국가에서는 그러한 민주주의의 다원적 특성이 사회 내에서 인간의 자유·평등·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기초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민주주의라는 것이 어디까지나 ‘제도’라는 것이다. 제도는 사회의 구성원 사이의 가치체제를 바탕을 두고 형성되는 복합적인 사회규범의 체계라 할 수 있으므로, 사회 구성원이 어떤 가치를 갖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제도의 성공과 실패가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제 민주주의와 같은, 단순히 어떠한 정치 형태가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을 구현하는데 더 적합한가에 대한 논쟁은 그 제도 자체의 결함을 발견할 수는 있어도, 중우정치의 위험성과 다수결의 횡포와 같은 민주주의가 제도로써 사회에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근본적인 결함을 발견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민주주의가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제도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민주주의 역시 그 자체가 가진 결함으로 독일의 나치즘처럼 후퇴할 수도 있다. 또한, 한국사회가 민주주의가 내용적으로 발전하도록 하려는 노력이 부족하여 장년층과 노년층 중 일부는 권위주의 정부가 민주화 이후의 정부보다 나았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따라서, 제도에 대한 논쟁과 더불어, 사회 구성원은 민주적 가치를 지키고자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통해 민주주의가 갖는 결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지난 상반기에 있었던 이명박 정부의 쇠고기 시장 개방으로 빚어진 촛불시위는 민주주의 제도가 자리 잡은지 이제 20년을 넘긴 한국사회에서 그런 고민을 대중의 수준에서 공론화시키고 초보적 수준일지라도 그 대안을 마련한 거의 최초의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은 쇠고기 파동이 일자 사회가 실질적으로 민주주의적이지 않을 때 어떻게 민주적으로 의사표시를 할 것인지 고민하고, 이를 정치에 어떻게 반영시킬 것인가에 대해 논쟁했다. 그리고 그러한 논쟁의 결과를 평화적 촛불시위라는 형태로 보여주었으며, 그로써 일정 정도의 정치적 성과도 거뒀다.

촛불시위를 통해 한국사회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왜 인류가 민주주의를 택했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결과, 민주사회의 구성원이 참여의식과 신념, 용기를 가지고, 사회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하며,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출할 때만이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정의이며, 이를 민주적으로 실현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고민의 산물만이 민주주의를 더 발전시키는 실제적인 원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