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12일 일요일

건국 기념도 필요하나 그것이 해방보다 우선할 순 없다

그동안 주로 학계에서만 화제가 되던 건국기념일에 대한 논쟁이 지난 8월 정치계를 비롯한 시민사회에까지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뉴라이트전국연합 등 보수진영은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을 발표한 1948년을 기점으로 건국기념일을 정하는 것이 옳다며 지금의 8월 15일 광복절을 건국절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진보진영은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는 것은 항일의 의미를 축소하고 훼손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역사적으로 건국기념일은 서유럽의 근대 민주주의 국가 형성 과정에서 등장한 개념이다. 유럽은 고대 로마제국이 붕괴된 이후 정치적으로는 봉건체제, 경제적으로는 장원체제에 의한 다원적 집합체가 형성되었다. 그 후 이러한 집합체 사회의 모순이 커지면서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한 시민혁명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그러한 집합체를 하나로 통합하여 민족을 단위로 하는 근대 국가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건국기념일은 시민혁명에 의한 근대 국가의 수립을 기념하는 날로써 자리매김하게 된다.

건국기념일을 제정하자는 주장은 그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한다. 즉, 한국사에서 근대 국가라고 할 수 있는 국가는 대한민국이고, 따라서 대한민국 건국을 기념하는 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을 듣고 어떤 이는 유럽의 역사적·사회적 맥락이 아시아 등 다른 세계에도 보편적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건국기념일이 민족을 단위로 한 최초의 국가를 기념하는 날이라면 유럽과 다르게 한국사에서는 단군을 부정한다 하더라도 그런 국가는 고대 시대부터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 국가를 민족 단위의 집합체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바라본 것이다. 근대 국가에 대한 그러한 인식은 근대사회가 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개인을 존중하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라는 특징을 갖게 되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대한민국은 근대적 의미의 국가로써, 봉건적 신분제로부터의 해방, 대의제 민주주의를 통한 대다수 민중의 정치 참여 확대 등을 최초로 실현한 국가라는 점에서 충분히 역사적으로 기념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한국 보수진영의 건국기념일 제정 노력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지금 건국기념일을 제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광복절을 건국기념일로 바꾸자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복은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건국에 비할만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한국 보수진영의 역사적 뿌리와 건국 초 그들이 보여준 모습을 상기할 때, 그들이 광복 대신 건국을 기념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려는 시도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해방일과 건국일이 8월 15일로 같은 이상, 이 날은 광복의 의미를 살리면서 건국의 의미를 되새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참된 의미의 건국기념일이 된다. 민족 또는 민중의 해방 없이는 건국도 없기 때문이다. 건국기념일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해방보다 우선할 순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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