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29일 월요일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판단할 수 있는가?

영화이자 소설이기도 한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주인공 알렉스는 자신의 쾌락을 취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폭력배가 되어 타인에게 수차례 폭력을 행사한다. 결국, 그는 사법당국에 의해 검거되어 교도소에 입소하게 된다. 장기간 복역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새로운 교도 프로그램의 실험 대상이 되어 교육을 받은 주인공은 교도소에서 조기에 출소하지만, 가족은 그의 출소를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당황한다. 그리고 집에 들인 하숙생은 주인공의 과거 범죄를 저지른 행적을 거론하며 그를 비난한다. 그 모습을 본 주인공은 분노의 감정을 느끼고 또다시 폭력을 행사하려고 하지만 그가 받은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구토 증세를 느끼며 쓰러진다.

그는 분명 자신의 출소를 반기기는커녕 오히려 당황하고 자신의 방을 하숙생에게 내어준 가족과, 자신의 과거를 들춰내는 하숙생에 대해 원망과 분노의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가 교도소에 입소하기 전에 보여준 폭력의 계기와는 분명히 다른 폭력의 계기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폭력전과가 있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국가권력에 의해 표현의 자유를 제한당했다. 자신의 분노를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국가권력에 의해 제한당해버린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탄생한 것이다.

그가 그 하숙생을 구타함으로써 예전의 그의 모습처럼 살인에 이르게 했을지 아니면 그가 의지력을 발휘해 단순한 주먹다짐으로 끝났을지 누가 예단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을 국가와 사회가 자기 멋대로 판단을 내리고 그의 폭력행사에 대해 어떠한 규정을 내리고 그를 구속하고 억압할 수 있는 것인가? 싸우면서 더 친해진다는 말이 있듯 그가 그 폭행을 계기로 하숙생과 친구처럼 지낼 가능성은 정말 없었을까?

혹자는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통쾌하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한 알렉스라는 한 인간이 갖는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얻게 된, 즉 타인에게 피해를 주며 얻은 또 다른 쾌락에 불과하다. 오히려 사회가 그러한 폭력을 계속해서 생산해낼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냈고 이를 정당화했다는 점에서 알렉스의 폭력보다 더 교묘하고도 구조적인 폭력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남에게 구속을 당하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리는 것은 가장 인간적인 행동이다. 자유는 인간 이외에는 어떤 것도 누릴 수 없는 권리이며, 그 어떤 가치보다 인간 자신의 의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러한 자유를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그 사회의 관습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제한을 가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의 미숙한 판단으로 또 다른 개인의 피해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지, 인간의 의지라는 소중한 인간적 가치를 잃어버리는 길로 나아가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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